💒평강을 위함이니라<큐티노트_김양재목사>
날짜 : 24.11.27 본문 : 사무엘상 16:1-23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5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16 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
17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
18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19 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20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
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22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김양재 목사입니다.
오늘 큐티인 말씀은 사무엘상 16장 1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 임한 사건이 평강을 위함임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내게 임한 사건이 평강을 위함임을 깨달으려면
첫째_슬픔을 해석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지도자로 세우고 일꾼으로 세우고 예수를 믿게 하는 데는 굉장한 긴장이 따르는 것 같아요. 심각한 슬픔이 오기도 하지요. 지금 사무엘에게도 슬픔이 왔습니다. 이 슬픔은 사울을 위한 슬픔이라고 해요.
1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해요. 생각해 보면 사울은 이스라엘을 위해 처음으로 세워진 지도자였어요.
사무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사울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대도 있었지요, 사울이 끝까지 잘해서 하나님께 칭찬받았더라면 더 없이 기뻤을 거예요.
그런데 점점 달라지는 사울을 바라보며 사무엘은 슬퍼합니다. 그의 타락을 지켜봐야만 했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후회하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사무엘이었을 거예요. 하나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하세요. 이 슬픔을 이해하고 아시지만 그 슬픔의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라는 거예요. 그리고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험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시며 인간적인 슬픔에 주저앉은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이 슬픔은 사명을 위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세팅인 것이죠. 저 역시 하루아침에 남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건 앞에서 주저앉아 슬퍼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에스겔 말씀을 통해 내 뿔의 말씀을 채워주셔서 이 일이 슬퍼하고 주저앉을 일이 아니라 공평한 사건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라고 해석해 주셨죠.
그러고서 하나님은 제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 도저히 살아낼 힘이 없는 그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살리고 이혼할 수밖에 없는 한 가정을 지키는 일에 힘쓰도록 하셨어요.
적용질문
-어떤 슬픔의 자리에 앉아 있나요?
-그 슬픔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며 주저앉아 있지는 않나요?
-그것을 말씀으로 해석해서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게 임한 사건이 평강을 위함임을 깨달으려면
둘째_외모가 아닌 중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이새의 집에 기름을 부으러 떠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러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 왕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에요.
4절에서 이새의 집이 있는 베들레헴에 사무엘이 이르자 그 성읍 장로들이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하고 물어요. 이에 사무엘은 5절에서 평강을 위함이니라 하고 답하지요. 사무엘의 순종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평강을 준비하는 순종이었어요. 이렇듯 오늘 내가 행하는 작은 순종도 큰 평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새가 그 아들들을 사무엘에게 데리고 나오자 사무엘은 사울처럼 준수한 장자 엘리압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립니다. 지금으로 보면 인류 대학을 나와 똑똑한 데다 키도 크고 우람하기까지 해요. 게다가 예수님이 오실 유다 가문으로 로열 패밀리죠. 그래서 사무엘이 하나님 찾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7절에서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세요. 그를 버렸노라에 그는 엘리압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울을 말하기도 하지요. 용모와 키에 가려진 사울은 끝까지 교만했어요. 하나님은 그런 그를 버렸다 하시며 동시에 엘리압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졌어요. 그 누가 외모를 안 보겠습니까? 볼 수 없어서 못 보는 일은 있어도 볼 수 있는 환경에서는 오직 외모만 봅니다. 이것을 인정하며 가야 해요. 이어 이새의 아들 아비나답, 삼마, 그리고 일곱 아들이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가지만 하나님은 아니라 하십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이 있는데 바로 무시의 대상 양치기 막내 아들 다윗이에요. 그 자리에 없던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지요. 아마 아버지 이새가 다윗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 같고, 평소에도 아버지와 형들에게 무시당하는 존재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런 다윗에게 주목하십니다.
12절에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고 하지요. 용모를 안 보시는 하나님이 다윗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저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그에게 성령이 임해 아름답다는 것이죠.
사무엘은 그런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지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역을 시키기 전에 성령을 먼저 주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주셔야만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적용질문
-나는 사람을 볼 때 첫눈에 무엇을 보나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내 중심은 어떠한가요?
-가장 무시받고 연약한 존재가 다윗일 수도 있음이 인정되나요?
《공동체 고백_악령이 떠난 성령의 사람으로》
외모에 속고 음란이 드러나는 사건을 겪으며 외모로 차별하고 교만하게 행하던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주님의 영에 감동되어 살아가기를 기도한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께 좋은 재능을 물려받았어요. 체력도 좋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는 늘 인정받는 자리에 있었죠. 교회에서는 찬양팀과 청소년부 교사를 하면서 인정받고 직장에서도 해결사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무능력한 사람, 학력이 없는 사람을 은근히 무시했죠.
7절처럼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며 저 스스로 나는 기름 부음받은 평신도야라고 자부하면서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저는 그럴듯한 외모와 카리스마를 가진 한 목회자에게 끌려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하며 40대 장로가 되기를 꿈꾸었지요.
그러나 제 신앙의 겉모습만 자랑하고 정작 맹신하던 교회와 목회자는 비난하면서 불순종의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던 중 제 안에 음란이 드러나게 되어 교만을 회개하게 되었고, 이후 큐티하는 공동체에 속해 구속사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교회 소그룹 리더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안에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는 마음이 있어요. 제가 속한 찬양팀에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할 때가 있지요. 이런 저의 연약함과 죄성을 이제는 알기에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주의 보혈를 의지해 긍휼을 구해요.
이제는 삶 속에서 겸손의 훈련을 잘 받아 더는 악령의 노예가 아닌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해요.
저의 적용을
내 생각이 아닌 말씀을 기준에 두고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직원들 앞에서 직장 상사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아 성령이 충만한 다윗과 달리 성령이 떠나 텅 빈 사울의 심령에는 악령이 임합니다.
다윗은 그런 사울 앞에 나아가 수금을 연주하여 그를 상쾌하게 하고 악령이 떠나가게 하죠. 하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입니다. 사울이 진정한 회복을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어야 해요.
회개하지 않는 한 정신질환은 고칠 수가 없어요. 진정한 치료는 오직 회개하고 자백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과 말씀으로만 치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평강을 누리는 지름길입니다.
이렇듯 슬픔을 말씀으로 해석하고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 나의 죄와 연약함을 내어놓고 회개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나에게 임한 사건이 해석되지 않아 말씀을 깨닫지도 듣지도 못하여 그저 인간적인 슬픔에 눈물을 흘릴 때가 많은 우리들이에요. 이 모든 고난의 사건들이 말씀으로 해석되어 내 뿔을 채워 사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해요.
외모만 보며 사람을 판단하는 모습을 용서해 주시옵시고, 중심을 바라보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속에 끝없는 죄악을 바라보며 회개할 때 성령의 기름이 부어져서
내 속에 끝없는 죄악을 바라보며 회개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 고난의 수금을 타고 노래하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아멘!!
주일예배_한달천하
새벽큐티_김신 초원지기
https://www.youtube.com/live/-01j6ffMJwU?si=Q_yO2Mt9sJm_G_iB
1127큐티노트
김양재 목사의 ost 나는 왜 내가 낯설까?
김양재 목사의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