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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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예언<큐티노트_김양재목사>
날짜 : 25.05.02 본문 : 예레미야 26:16-24

16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
17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8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19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20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21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22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23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김양재 목사입니다.

오늘 큐티인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16절에서 24절까지예요.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아닌 주님을 두려워하므로 여호와 이름으로 예언하는 사명을 담대히 감당하기를 원해요.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담대히 사명을 감당하려면
첫째_어떤 말씀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보고서 마음의 감동을 받았을까요?
16절에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장로 몇 사람이 일어나 같이 변호를 해요. 과연 장로들이라 성경 지식이 많아서 그런지 히스기야 예를 들며 미가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망한다고 경고했어도 죽이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히려 히스기야는 미가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하고 구원을 간구했다는 내용이지요.

그 결과가 어떠했나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무시무시한 앗수르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어요. 결국 장로들이 한 말의 요지는 어떤 심판과 저주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서 회개할 것을 찾고 돌이키는 게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늘 복받는 이야기만 좋아합니다. 성경에는 축복의 말씀보다 저주의 말씀이 훨씬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복에 관한 구절은 기가 막히게 잘 외우면서도 저주에 관한 구절은 기억도 잘 못하지요 여기서부터 우리의 기복이 드러납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복과 저주도 그렇습니다.

큐티 목회 세미나를 다녀가시고서 큐티 목회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한 목사님이 한 성도님의 개업예배를 인도하러 가시는데 하필 그날 큐티 본문이 저주에 관한 말씀이었다고 해요. 축복을 빌어주어도 모자랄 지경인데 개업 예배 본문이 저주의 말씀이라니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그런데 어떻게든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끙끙거리시면서 다시 본문을 보니 저주받는 그 이유들이 쭉 써 있더라는 것이죠. 뒤집어서 생각을 해보니까 저주받을 짓만 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이걸 깨달으셨다고 해요.

그래서 개업예배에 가셔서 이렇게만 하지 않으시면 이 가게는 하나님의 사업장으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셨답니다.
어떤 말씀도 이렇게 띵크를 하면 버릴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도 이 말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면 옷깃을 여미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구속사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틀릴 수 있구나, 내가 잘못한 걸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이 지혜이고 생명의 가치관입니다.

적용 질문
-여러분은 저주의 말씀과 축복의 말씀 중에 어떤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나요?
-듣기 힘든 말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하냐며 화만 내지는 않습니까?

담대히 사명을 감당하려면
둘째_하나님을 최고의 상급으로 여겨야 합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를 보니 장로들은 계속해서 우리야의 일을 예로 들어요. 우리야도 미가 선지자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경고의 예언을 했지요. 그런데 히스기야와는 반대로 여호야 김은 그런 우리야를 찾아서 죽여버립니다.

똑같은 말씀으로 들어도 이렇게 상반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어요. 제가 설교를 하면 회개하며 돌이키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인정이 되지 않아 화를 내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제가 더 지혜롭게 말씀을 전했어야 했나 늘 노심초사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니 한편으로는 이것이 당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야는 칼로 비참하게 죽임 당하고 반역죄라는 판결까지 받았어요. 게다가 평민의 무덤 위에 던져지는 수치스러운 매장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보면서 자신의 마지막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순종의 결론이 이런 비참함이라면 순종을 하는 것이 참 망설여지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명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오해를 받으려면 받아야 하고,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벌이 아니라 상인 것이지요. 이 땅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의 상급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상급만 바라본다면 결코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없지요. 그 안에 얼마나 이해타산을 따지는 계산이 있겠습니까? 순종할 만하면 순종하고 그게 아니면 내 팽개치는 것이 사명은 아니죠. 상급을 보며 순종할 것을 정하는 것 역시 사명이 아닙니다.

적용질문
-순종의 결론이 비참함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징벌로 여겨져 실족하지는 않았나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상급을 구하며 사명도 고르려고 하진 않습니까?

《공동체 고백_청년 큐티인》

말씀을 통해 멸망의 말을 생명의 말로 바꾸어 주심으로 회개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한 청년의 청년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는 직장에서 디자인 관련 업무를 맡아 사내 행사 때마다 현수막이나 디자인 물품들을 만들고 있어요. 그런데 한 번은 행사 담당자가 정확한 타이틀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저에게 현수막 디자인을 요청했어요.

저는 추후에 수정하기 번거로우니 최종 문구를 확정해서 알려주시면 그 후에 디자인 할게요라고 답했죠. 그러자 담당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어떻게 번거롭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일하기 싫은 거냐며 저를 무섭게 몰아붙였어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크게 화를 낼 일인가 하며 무섭고 놀란 마음은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았지 저는 너무 억울해서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을 공론화하여 상대에게 제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되갚고 싶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상황과 사람을 통해 저의 고발을 막으시고 제 죄와 연약함만 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21절에서 우리야의 예언을 듣고 그를 죽이려고 한 여호야김 왕처럼 저도 제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싫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되갚으려 했어요.

그러나 제 교만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니 19절에서 미가의 예언을 듣고 돌이킨 히스기야 왕처럼 그 담당자를 고발하는 대신 제 죄를 회개하고 사과의 말을 통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멸망의 말을 내가 잘못했다. 이 생명의 말로 바꿔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저의 적용은
업무에 필요한 소통을 할 때 상대와 눈을 맞추고 성의 있게 듣겠습니다.
제 죄가 깨달아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큐티하겠습니다.

24절에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아직 예레미야의 사명이 남았기에 아히감의 보호를 받게 하시는 주님이세요. 이렇게 때마다 돕는 손길이 있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주님은 때마다 의외의 사람들에게서 돕는 손길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지금껏 사명의 길을 걸어오게 하셨어요.

큐티 선교의 시작도 그러했고, 목회를 하면서도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저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그렇게 보호해 주셨어요. 아직까지 저의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간증한 청년의 고백처럼 내가 뭘 잘못했냐라는 말은 멸망의 말이고, 내가 잘못했다라는 말은 생명의 말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가치관이죠.

이것이 되지 않아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다 옳고 그름의 싸움에서 벗어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오늘 하루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씀 때문에 이 생명의 말을 해보기로 적용하시면 어떨까요? 말씀대로 한 적용은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고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드릴게요. 주님

어떠한 말을 들어도 히스기야처럼 회개할 것을 찾아야 하는데, 심판의 말은 듣기도 싫고 망한다는 얘기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분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만 가득한 여호야김의 모습이 저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내 죄를 보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이 천지차이인데 오늘 저희에게 이 말씀이 들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내가 들어야 할 말임을 인정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럴 때마다 우리를 돕는 아히감과 같은 손길들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명이 다하기까지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실 주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저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아멘!!

주일예배_반드시 건지실지라!

새벽큐티_정지훈 목사

https://www.youtube.com/live/L9kc9kwXCAs?si=5k5BCz_82JkMMjXh

0502큐티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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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이 편지가 이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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